고소한 원두 디카페인 집에서 맛있게 내리는 방법

얼마 전 단골손님이 디카페인 원두를 가져와 한 잔 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집에서는 땅콩처럼 고소한 향이 났다가도 마시면 밍밍하고 끝맛은 쓰다고 하더군요. 같은 원두로 물 온도를 조금 낮추고 분쇄도를 바꾸자, 단맛이 살아나면서 쓴맛이 한결 줄었습니다. 디카페인은 원두 선택도 중요하지만 추출할 때의 작은 차이가 잔에서 꽤 크게 느껴집니다.
고소한 맛을 원한다면 원두 설명부터 읽습니다
고소하다는 말은 사람마다 가리키는 맛이 다릅니다. 볶은 아몬드 같은 향을 원하는 분도 있고, 밀크초콜릿의 부드러운 단맛을 떠올리는 분도 있죠. 원두 봉투에 견과류, 카카오, 캐러멜, 곡물 같은 표현이 있다면 원하는 방향에 가까울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 문구는 향미를 설명하는 말이지, 해당 재료가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로스팅은 중배전에서 중강배전부터 찾아보는 편이 편합니다. 너무 밝게 볶은 원두는 산뜻한 과일 향이 앞설 수 있고, 아주 짙게 볶으면 견과류의 단맛보다 탄 향과 쓴맛이 강해지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산지가 맛을 결정하는 공식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산지의 생두라도 가공 방식과 로스팅에 따라 잔의 인상은 달라집니다.
처음 사는 원두라면 큰 봉투보다 200g 안팎의 소포장이 좋습니다. 봉투의 로스팅 날짜를 보고, 향미 설명이 구체적인 제품을 고르세요. 디카페인 처리 방식이 적혀 있다면 함께 읽어두면 좋지만, 처리 방식의 이름만으로 고소함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마셨을 때의 향과 단맛이 더 확실한 기준입니다.
밍밍한데 쓴맛까지 난다면 분쇄도를 봅니다
손님이 가져온 원두는 드리퍼에 비해 꽤 곱게 갈려 있었습니다. 물이 천천히 빠지는 동안 쓴맛은 늘었는데, 물을 많이 부어 농도까지 옅어졌죠. 그래서 저는 먼저 원두와 물의 비율을 고정합니다. 시작점은 원두 18g에 물 270g, 약 1대 15입니다. 이 비율로 몇 잔 내려봐야 분쇄도를 바꿨을 때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핸드드립이라면 설탕보다 약간 굵은 느낌으로 갈고, 물 온도는 92~94℃에서 시작합니다. 원두를 적실 만큼 약 35~40g을 붓고 30~40초 기다린 뒤, 나머지 물을 두세 차례 나눠 붓습니다. 전체 추출이 대략 2분 30초에서 3분 30초 사이에 끝나면 먼저 맛을 봅니다. 시간은 합격선이 아닙니다. 드리퍼와 필터, 물 붓는 속도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입안에서 묽고 신맛이 도드라진다면 조금 더 곱게 갈거나 물 온도를 1~2℃ 올려봅니다. 반대로 입안을 말리는 쓴맛이 남으면 조금 굵게 갈아봅니다. 고소한 향은 나는데 맛만 옅다면 분쇄도보다 원두 양을 먼저 1~2g 늘리는 쪽이 낫습니다. 한 번에 여러 조건을 바꾸면 어느 조정이 효과가 있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우유에 넣을 때는 농도를 따로 맞춥니다
드립으로 맛있던 디카페인도 우유를 넣으면 존재감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유가 커피의 쓴맛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향을 희석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라테처럼 마신다면 드립 비율을 그대로 늘리기보다 진한 커피를 소량 만드는 편이 낫습니다. 원두 18g에 물 180~210g 정도로 시작해 우유 100~150g을 섞으면 견과류와 초콜릿 계열 향이 비교적 또렷하게 남습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쓴다면 원두 18g에서 음료 36g을 뽑는 비율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너무 날카롭고 묽으면 분쇄도를 조금 곱게, 무겁고 쓰면 조금 굵게 조정합니다. 추출 시간 숫자 하나에 맞추기보다 우유를 섞은 뒤에도 단맛이 느껴지는지를 보세요. 비싼 머신보다 매번 비슷한 양을 재는 저울이 이 과정에서는 더 유용합니다.
마지막 잔까지 맛있게 마시려면 날짜를 챙깁니다
고소한 원두 디카페인을 찾는 손님에게 제가 자주 묻는 건 장비보다 구매 날짜입니다. 봉투를 연 뒤 몇 주 동안 따뜻한 주방에 두면 향이 먼저 약해집니다. 그러면 고소한 향을 되찾으려고 더 곱게 갈거나 오래 추출하게 되고, 쓴맛만 늘기 쉽습니다. 자주 마시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작은 봉투를 사는 편이 경제적입니다.
원두는 밀폐해 빛과 열을 피하고, 필요한 양만 그때그때 가는 게 좋습니다. 대용량을 샀다면 한두 주 안에 마실 분량씩 나눠 밀폐한 뒤 냉동할 수 있습니다. 꺼낸 봉투는 반복해서 열고 닫지 말고, 한 봉투를 다 쓸 때까지 사용하세요. 맛이 약해진 원두를 장비로 되살리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디카페인을 고를 때 ‘일반 커피와 똑같은가’보다 저녁에도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한 잔으로 충분히 맛있는가를 봅니다. 로스팅 날짜가 분명한 원두를 작은 양으로 사고, 같은 비율에서 분쇄도 하나만 조절해도 고소함의 윤곽이 잡힙니다. 그 한 잔이 마음에 들면 그때 원두와 레시피를 함께 적어두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