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티 커피 기준을 알고 원두 고르는 방법

얼마 전 손님이 같은 원두를 매장에서 마셨을 때는 복숭아 향이 났는데, 집에서는 시기만 하다며 봉투를 가져오셨습니다. 원두를 다시 내려 보니 향은 그대로였어요. 손님 댁에서 쓰는 분쇄도가 조금 굵고 물 온도가 낮았습니다. 이럴 때면 ‘스페셜티’라는 말이 좋은 맛을 보증하는 도장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늘 아쉽습니다. 원두의 가능성과 컵에서 나는 맛 사이에는 추출이라는 과정이 있거든요.
80점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왔을까
오랫동안 업계에서는 커핑 점수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스페셜티 커피의 기준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커핑은 일정한 조건에서 커피를 우려 향, 맛, 산미, 질감, 후미 등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원두를 살 때 ‘84점’ 같은 숫자를 봤다면 대개 이런 평가의 흔적입니다. 숫자는 서로 다른 생두를 비교할 때 유용하지만, 84점짜리가 82점짜리보다 내 취향에 맞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재 스페셜티커피협회는 스페셜티 커피를 하나의 점수로만 정의하지 않습니다. 뚜렷한 특성이 있고, 그 특성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커피 또는 커피 경험으로 봅니다. 협회의 커피 가치 평가 체계도 생두의 물리적 상태, 향미를 묘사한 내용, 맛에 대한 평가, 산지와 생산 정보 등을 함께 기록합니다. 따라서 ‘80점만 넘으면 무조건 스페셜티’라는 설명은 익숙한 출발점이지만, 지금의 관점을 모두 담지는 못합니다.
봉투에서는 점수보다 정보를 먼저 본다
제가 원두 봉투를 고를 때 먼저 보는 것은 생산 국가보다 한 단계 더 구체적인 정보입니다. 지역이나 농장, 품종, 가공 방식이 적혀 있으면 어떤 맛을 기대할지 가늠하기 쉽습니다. 이를테면 같은 에티오피아 원두라도 품종과 가공 방식, 로스팅에 따라 꽃 향이 선명할 수도 있고 잘 익은 과일처럼 묵직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 이름 하나로 맛을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맛 설명도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과일 향’보다는 ‘식었을 때 살구 같은 향과 차를 닮은 후미’가 제게는 쓸모 있는 정보입니다. 다만 봉투에 적힌 살구가 실제 과즙을 넣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커피에서 떠오르는 향을 표현한 말이고, 사람마다 느끼는 강도도 다릅니다. 산미가 부담스럽다면 맛 설명에서 감귤, 꽃, 차 같은 표현만 볼 것이 아니라 로스팅 정도와 질감에 관한 설명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로스팅 날짜 역시 확인합니다. 제가 손님에게 권하는 시작점은 볶은 뒤 며칠간 가스를 조금 빼고, 한 번에 마실 만큼만 사는 것입니다. 필터 커피라면 로스팅 후 5~14일 사이부터 맛의 변화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진하게 볶은 원두나 에스프레소용 원두는 적당한 시점이 다를 수 있어요. ‘최근에 볶았다’는 문구보다 날짜가 적혀 있는 편이 판단하기 쉽고, 개봉 뒤에는 밀봉해 서늘한 곳에 두는 편이 향을 지키는 데 유리합니다.
좋은 원두가 집에서 시게 느껴지는 이유
스페셜티 커피의 산미는 불쾌한 신맛과 같지 않습니다. 잘 추출된 커피에서는 단맛과 함께 느껴져 사과나 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물이 너무 차갑거나 분쇄가 지나치게 굵으면 단맛을 충분히 끌어내기 전에 추출이 끝나, 산미만 날카롭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곱게 갈거나 오래 우려 쓴맛과 텁텁함이 두드러질 수도 있고요.
집에서 드리퍼를 쓴다면 원두 15g에 물 240g, 물 온도 92~94℃, 총 추출 시간 2분 30초~3분을 첫 기준으로 잡아 볼 만합니다. 같은 원두로 두 잔을 내리되 한 잔만 분쇄도를 조금 곱게 바꾸면 차이가 더 분명합니다. 단맛이 늘고 신맛이 부드러워졌다면 그 방향이 맞았던 겁니다. 이미 쓰고 떫다면 다시 조금 굵게 가는 편이 낫습니다. 물 온도와 분쇄도를 한꺼번에 바꾸면 무엇 때문에 맛이 달라졌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물도 영향을 줍니다. 생수를 바꿨더니 향이 달라졌다는 손님이 종종 있는데, 물에 녹아 있는 성분이 추출과 맛의 인상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물을 여러 종류 사서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늘 마시는 물로 레시피를 맞춘 뒤에도 맛이 유난히 밋밋하거나 거칠다면 그때 물을 바꿔 비교해도 늦지 않습니다.
가격표 앞에서 내 취향을 확인하는 순서
비싼 원두가 필요한 날도 있지만, 평소 마실 커피까지 늘 높은 점수를 좇을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처음 사는 원두라면 작은 용량으로 고르고, 평소 좋아하는 맛과 한 가지 다른 특징이 있는지 봅니다. 고소한 커피를 즐긴다면 초콜릿이나 견과류 설명이 있는 원두에서 시작해, 다음에는 과일 향이 조금 있는 원두로 옮겨 가는 식입니다. 맛의 거리를 조금씩 좁히면 가격을 쓰고도 한 봉지를 끝내지 못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커핑 점수와 산지 정보는 원두를 이해하는 데 좋은 단서입니다. 하지만 제 로스터리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손님들은 높은 점수를 맞힌 분들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단맛과 산미의 균형을 알아낸 분들이었어요. 봉투의 숫자를 읽고 한 잔을 직접 내려 본 뒤, 식어 가는 동안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느끼는 것. 저는 그 과정이 스페셜티 커피를 즐기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