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버 드리퍼로 집에서 커피 맛을 맞추는 방법

로스터리에서 마신 커피가 집에서는 유난히 시고 묽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같은 원두를 썼는데도 그렇죠. 손님이 쓰는 물의 양과 분쇄도를 들어보면 원인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클레버 드리퍼는 이 차이를 찾기 좋은 기구입니다. 물을 붓는 속도에 덜 매달려도 되고, 원두와 물이 만나는 시간을 직접 정할 수 있으니까요.
클레버 드리퍼는 물을 머금었다가 내려보냅니다
겉모습은 일반 드리퍼와 비슷하지만 바닥에 밸브가 있습니다. 컵 위에 올리기 전에는 커피가 드리퍼 안에 머물고, 컵 위에 올리면 밸브가 열려 종이 필터를 지나 내려갑니다. 침지식 추출과 종이 필터 추출을 한 기구에서 하는 셈입니다. 프렌치프레스처럼 물에 충분히 담가 추출하면서도, 잔에는 미세한 가루가 적게 남습니다.
손으로 물줄기를 계속 조절하는 드립에 비하면 재현하기 편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내려도 같은 맛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분쇄가 너무 고우면 배수가 늦어지고, 너무 굵으면 충분히 담가 두어도 맛이 비어 보일 수 있습니다. 큰 크기의 클레버 드리퍼는 보통 4번 종이 필터를 씁니다. 가지고 있는 기구의 크기를 확인하고 필터를 고르는 게 먼저입니다.
원두 20g과 물 300g에서 시작합니다
제가 집에서 한 잔 넉넉히 내릴 때 잡는 출발점은 원두 20g, 물 300g입니다. 원두와 물의 비율이 1 대 15라서 맛을 비교하기에도 편합니다. 물 온도는 중간 정도로 볶은 원두라면 93~95℃, 분쇄도는 일반적인 핸드드립보다 약간 굵은 쪽에서 시작합니다. 그라인더마다 눈금이 달라 몇 클릭이라고 못 박기보다는 첫 잔을 마시고 조절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 종이 필터의 접힌 부분을 맞춰 끼우고 뜨거운 물로 적신 뒤, 그 물은 버립니다.
- 드리퍼를 컵에서 내려 저울 위에 놓고 뜨거운 물 300g을 붓습니다. 그다음 간 원두 20g을 넣습니다.
- 마른 가루가 남지 않도록 숟가락으로 가볍게 저어 줍니다. 원두를 넣은 시점부터 시간을 잽니다.
- 뚜껑을 덮고 약 2분 30초 기다립니다. 표면에 뜬 가루를 한두 번 부드럽게 저은 뒤 컵 위에 올려 커피를 내립니다.
물을 먼저 넣으면 가루가 필터 바닥에 한꺼번에 달라붙는 일이 줄어 배수가 한결 수월합니다. 내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원두와 분쇄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만, 처음에는 1분 안팎을 기준으로 보시면 됩니다. 침지 시간과 배수 시간을 합쳐 대략 3분 30초에서 4분이면 한 잔이 나옵니다. 필터를 적실 때 쓴 물을 버리지 않으면 비율이 달라지니 그 부분만 챙기면 됩니다.
시고 묽을 때와 쓰고 텁텁할 때
맛이 날카롭게 시고 물처럼 가볍다면 우선 원두를 조금 더 곱게 갈아 봅니다. 다른 조건은 그대로 두고 한 단계만 바꾸는 겁니다. 그래도 중심 맛이 약하면 침지 시간을 30초 늘려 보세요. 산미 자체가 잘못된 맛은 아닙니다. 다만 단맛이 받쳐 주지 않아 신맛만 도드라진다면 추출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혀에 쓴맛이 오래 남고 입안이 마르는 느낌이라면 분쇄를 조금 굵게 해봅니다. 배수에 2분 넘게 걸린다면 특히 분쇄 상태를 살펴볼 만합니다. 아주 고운 가루가 많이 생기는 그라인더에서는 필터가 막히기도 하거든요. 젓는 횟수를 줄이는 것만으로 배수가 나아질 때도 있습니다.
볶음 정도도 함께 봐야 합니다. 밝게 볶은 원두는 같은 조건에서 맛이 덜 풀릴 수 있어 온도를 조금 높이거나 시간을 늘리는 쪽이 맞을 수 있습니다. 진하게 볶은 원두가 지나치게 쓰다면 90~92℃ 정도로 온도를 낮춰 비교해 봅니다. 물 온도, 분쇄도, 시간을 한꺼번에 바꾸면 어느 조절이 효과가 있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한 잔마다 한 가지만 움직이는 게 빠릅니다.
장비보다 먼저 확인할 것
비싼 주전자나 서버가 있어야 클레버 드리퍼를 잘 쓰는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드리퍼, 맞는 필터, 저울, 원두를 고르게 갈 수 있는 그라인더면 충분합니다. 온도 조절 주전자가 없다면 온도계를 쓰거나, 끓인 물을 다른 용기에 옮겨 온도를 확인해도 됩니다. 물줄기를 섬세하게 그려 넣는 방식이 아니라서 주전자 주둥이 모양에도 덜 민감합니다.
집에서 맛이 계속 어긋난다면 원두를 산 날짜도 확인합니다. 구매한 날보다 중요한 것은 포장에 적힌 로스팅 날짜와 보관 상태입니다. 같은 원두라도 개봉한 봉지를 따뜻한 곳에 오래 두면 향이 달라집니다. 밀폐해 서늘한 곳에 두고, 비교할 때는 가능하면 같은 물을 쓰세요. 물맛이 달라지면 레시피를 그대로 지켜도 잔의 인상이 바뀝니다.
제게 클레버 드리퍼의 좋은 점은 ‘정답 같은 한 잔’을 만들어 준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원두가 왜 시게 느껴졌는지, 어제보다 분쇄를 조금 바꿨을 때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차분히 맛볼 여유를 줍니다. 그렇게 몇 잔을 내리다 보면 집에서 좋아하는 맛의 기준도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